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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대사, 베트남 외교의 흔적

지난 37년간 대외적인 업무를 맡아오며 오스트리아와 캐나다의 대사를 역임한 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 유네스코 국가위원회 총 서기관 국장은 베트남이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를 설립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응웬티호이 씨는 베트남과 오스트리아, 베트남과 캐나다 양국의 국가 원수 정식 방문을 처음으로 성사시킨 여성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베트남이 WTO에 가입하는 과정에 있어서 성공적으로 국제적인 원조금을 조달하였고, 세계 유네스코 위원회가 선정한 유네스코의 60년에 기여한 대표적인 60인의 여성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집은 서양의 현대적인 미와 동양의 풍수지리적 멋이 함께 어우러진 유라시아 건축 방식으로 지어진 주택이다.
그녀를 만난 날, 우리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호이 훙(Hồi hung)”이라는 특별한 별명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알고 보니, 이 별명은 베트남과 캐나다 양국 간의 외교관계의 터닝 포인트가 된 중요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이 별명은 2005년 캐나다로 첫 고위 관계자들의 정식 방문이 이루어졌을 때 판반카이(Phan Văn Khải)총리가 그녀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했다. 이 방문은 베트남의 총리가 처음으로 캐나다에 방문한 역사적인 공식 외교행사였으며, 호이 씨는 이 일을 성사시킨 장본인이었다.

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대사(2015년4월).사진:찐반보(Trịnh Văn Bộ)


태국에서 1982년개최한 ESCAP에참여한 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 .사진:자료

1991년 ESCAP회의에서 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 사진:자료

이 역사적인 공식 방문을 진행하기 위해 그녀는 베트남 경제 기반에 전환점이 되는 작용을 일으켰다. 그것은 베트남이 WTO 가입을 진행하는 일에 있어서 국제적인 원조, 특히 캐나다의 원조이다. 베트남은 미국보다도 캐나다와 먼저 이에 관한 담판을 마무리 지었고, 이 일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당시 캐나다 대사직을 맡고 있던 호이 씨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입론 능력은 베트남이 G7 국가들로부터 첫 표를 받고, 캐나다의 정객들에게 특별한 발자취를 남기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호이 씨는 자신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 캐나다는 미국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언짢아 한다는 그들의 심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캐나다 대표단장과의 담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 캐나다는 미국이 아닌데 왜 당신은 미국이 먼저 나서기만을 기다립니까. 그리고 둘째, 역사 속에서도 캐나다는 프랑스, 미국과의 베트남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끝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두 개의 휴전협정에 참가한 국가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나라입니다. 또한 만약 미국이 원조를 하고 나면 캐나다도 어차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보다 캐나다가 베트남 원조에 먼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녀는 캐나다가 인권을 가장 우선적으로 여기는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주장을 이어갔다. “만약 캐나다가 베트남 국민들에게 이와 같은 따뜻한 마음의 선물을 전달한다면 여성과 어린이들로부터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많은 기업 직원들 중 대부분이 여성들이고, 그들의 뒤에는 항상 어린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세운 뛰어난 입론, 그리고 한 베트남 계 캐나다 기업인의 도움으로 베트남은 미국보다 캐나다와 먼저 담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은 G7국가들로부터 첫 번째 원조를 받게 되었고, 이는 베트남이 WTO에 가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담판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캐나다 정부 관계자들은 베트남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위신을 더욱 더 견고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호이 씨는 판반카이 총리의 캐나다 방문행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캐나다 방문기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탄복하곤 한다. 2005년 당시, 붉은 바탕에 노란별이 가운데에 있는 베트남의 국기는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하물며 이 날에는 판반카이 총리의 캐나다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2.000개의 베트남 국기가 캐나다 국기와 엇갈려서 길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캐나다 거리 위를 붉게 수놓던 베트남 국기의 모습이 가져다준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당시 판반카이 총리는 그녀를 만나 “호이 대사님, 너무나 대담(“hung”)하시네요!”라고 전하였고, 그때부터 그녀의 별명이 호이 훙(hung)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오스트리아 대사 임기 또한 매우 특별했다. 우리는 그녀가 오스트리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이 사진에 대해 그녀가 오스트리아 대사직을 맡았던 4년 동안(1992-1995) 있었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기념이라고 했다. 호이 씨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베트남 고향마을로 보내 가족들에게 카페트에 수를 놓을 것을 부탁하였다고 했다. 그 후 이 선물은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생일 날짜에 맞춰서 대통령 집무실로 보내졌고, 그녀는 대통령으로부터 “…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섬세하고 정확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는 내용이 담긴 감사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대통령궁에서 응웬티호이 (Nguyễn Thị Hồi).사진:자료


오스트리아 대통령궁에서 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은 국서를 체줄한다. 사진: 자료


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 대사는 1995년에 임기 만료시 (Thomas Klestil)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인사한다.사진: 자료



응웬티호이(Nguyễn Thị Hồi)은 1992년에 Salzbourge시장과 만남을 갖다. 사진: 자료
 
그해 말, 오스트리아에 있는 각국의 대사들이 모임을 가지던 중,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한 사람씩 악수를 청하였는데, 그녀의 차례가 되고 그녀가 스스로를 베트남 대사라고 소개하자, 대통령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에게 포옹하고 다정한 감사의 키스를 하며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정말 감사했어요!”라고 했다. 이는 바로 옆에 있던 세계 각국 대사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그들은 그녀에게 대사직을 맡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녀가 어떻게 대통령과 그렇게 빨리 친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민족문화에 담겨있는 겸손함과 섬세함이 그녀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뒷받침해 주었고, 그로 인해 그녀가 오스트리아와 많은 중요한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대사로서의 임기를 마치면서 그녀는 국가를 위한 사명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녀가 쌓아온 외교 “벽돌”들은 베트남의 다음 세대가 외교 활동으로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기반이 되어주고 있다.

[베트남통신사_타오비(Thảo Vy)_찐반보(Trịnh Văn Bộ)사진]

honghan

하티투탄, 베트남 회계 감사의 철의 여인

하티투탄, 베트남 회계 감사의 '철의 여인'

선구자의 용기와 결단력으로 베트남 여성 기업 협회 부회장인 "철의 여인" 하티투탄(Hà Thị Thu Thanh) 딜로이트 베트남(Deloitte Vietnam) 이사회 의장이자 총리 행정절차 개혁 자문위원회 위원은 Deloitte Vietnam와의 자랑스러운 30년의 여정을 통해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최고의 컨설팅 및 감사 회사가 되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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