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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군율'과 장관 아들의 '전화휴가'

'여러 고을 색리 11명을 처형했다. 옥과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水軍) 보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 도피자가 많아 100여 명이나 되었는데, 늘 거짓말로 꾸며대 왔다. 그래서 오늘 형을 집행해 목을 베어 백성들에게 보였다.'
난중일기 1593년 6월 8일자.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이 흘러 전쟁이 한창이던 와중에 이순신은 '색리'(色吏)를 11명이나 처형한다. 색리는 감영이나 군아의 말단 관원이다. 군사 징병을 도맡은 색리들이 뇌물을 받고 병사들을 군영에 보내지 않으면서 거짓말로 둘러댔다는 게 이유다.
전쟁 중 한명의 전투원이 아쉬운 마당이었지만, 이순신은 군율과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주저없이 '썩은 관리'들의 목을 베었다.
6개월이 지나고 이순신은 또다시 관아 아전을 사형시킨다. '동헌에 나가 남평의 도병방(都兵房)을 처형했다.'(1594년 1월6일·난중일기) 도평방은 군사 사무를 맡은 우두머리 아전이다.
두 달 뒤 또 피바람이 불었다. '활터 정자로 올라가 검모포 만호(고급장교)를 문책하고 곤장을 쳤다. 도훈도(都訓導·수군통제사 소속 장교)를 처형했다.'(1594년3월1일·난중일기)

이순신의 군율
이순신은 직무태만을 눈감고 지나가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난중일기에는 숱한 처형과 곤장이 서술돼 있다. 군율과 군기에 엄격했다. 고급장교라 해서, 내 곁에 있어 친하다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가차없이 문책하고 벌을 줬다. 어떻게 보면 '모시기 힘든 상사'다.
윗사람들에게 사랑받기도 힘든 인물이었다. 2015년 11월1일 전남 고흥군은 도화면 발포 충무사 앞 오동나무 청렴박석광장에서 '발포만호 이순신 오동나무 청렴일화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순신과 오동나무가 무슨 연관이라 비석까지 세웠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2년전인 1580년 7월. 이순신은 발포 만호로 발령받는다. 전라 좌수사 성박이 '내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니 발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보내라'고 명령한다.
관아의 오동나무, 그냥 잘라 잘 포장해 보내면 그만이다. 게다가 전라 좌수사는 직속상관 아닌가.
이순신은 상사에게 사랑받는 기회를 발로 찬다.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키워온 나무를 하루아침에 벨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전라 좌수사 성박은 어이없기도 하고, 화가 치솟았지만 이순신의 인물 됨됨이를 듣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분을 삭였다.

무너진 조선의 군정(軍政)
조선은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야욕에 희생당했지만 망조는 오래전부터 들었다. 조선을 기울게 한 원인으로는 '삼정(三政)의 문란'이 대표적이다.
삼정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이다. 전정은 공정하고 정확한 논밭의 조사와 측량을 바탕으로 1년에 소출되는 양을 검사해 균등한 전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군정은 원래 조선은 군적에 따라 양인 가운데 병사를 뽑고 보포(保布·군역을 면제시켜주는 대신 내는 베나 포를 주는 제도였다. 다시 말해 군인으로 차출된 농민이 벌어먹고 살 방도가 없으니 다른 농민이 그 집에 먹고 살 베나 포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 가기 싫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15세기 말부터 군포를 내면 병역을 면제받는 제도로 변질됐다.
환정은 곡식 대출제도다. 봄철 보릿고개에 농민에게 국가가 식량과 씨앗을 빌려줬다 가을 추수 이후에 돌려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조세·병역·대출이 삼정인 셈이다. 삼정의 문란은 이 세가지 제도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전정의 문란은 지방수령과 토호들이 농간을 부리면서 온갖 잡세가 붙어 공정세금제도가 붕괴됐다. 군정의 문란은 조선후기 돈 좀 있는 농민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양반으로 편입되거나 돈없는 백성들은 산골짜기로 도망을 치는 등 군포가 줄어들자 관청에서 죽은 사람까지도 강제 징수하는 백골징포 등 불법징수가 횡행한 것을 일컫는다.
환정의 문란은 국가재정이 어려워지고, 아전들의 횡포가 늘면서 돌려받는 이자격인 곡식을 터무니없이 많이 걷거나 빌려주는 곡식에 모래나 겨를 섞어 실제 양을 줄인 뒤 거둘 때는 제대로 받는 등 방법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현대 국가에서도 다를 바 없다. 조세와 병역, 고리대를 포함한 대출이 문란해지면 민심을 자극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
조선은 삼정의 문란이 가시화되면서 1811년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전국적인 임술농민항쟁, 1894년 동학혁명 등 농민항쟁이 이어지다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세도정치에 꺾인 철종의 삼정개혁
(왕이) 하교하기를 "군정·적정(환정)·전정의 3정은 국가에 있어서 대정(大政)인데, 현재 3정이 모두 병들어 민생이 고달프고 초췌해졌다."(철종3년(1852년) 10월 22일)
(왕이) 하교하기를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이정청을 설치하여 강구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묘당의 제신이 지금 바야흐로 상확하여 교정하고 있는데, 이는 조가(朝家)에서 크게 경장하는 데 관계된 것이므로, 널리 묻고 널리 의견을 채집하여 사리에 꼭 맞도록 힘쓰지 않을 수 없다."(철종 13년(1862년) 6월 10일)
조선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불린다. 헌종10년(1844년)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됐다 헌종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의 비)의 명으로 궁에 들어와 왕위를 이었다.
당시 권력을 쥐고 흔든 안동김씨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강화도에 있는 '만만한 왕족'을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철종은 별반 한 일이 없는 '허수아비' 임금이라는 것이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삼정문란도 극에 달하면서 재위 기간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 등 전국에서 대규모 민란이 빈발했다.
하지만 철종이 강하게 밀어붙인 국정 철학이 있다. 다름 아닌 '삼정문란 혁파'다.
철종은 삼정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관청인 '이정청'까지 세우고 개혁에 집중했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당시 정국을 좌우하던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막혀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장삼이사가 이해되는 세상와야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의 군생활 시절 '휴가 미복귀' 문제로 시끌시끌하다. 반박과 재반박이 난무하고 있다. 여당에서는 추미애 장관을 엄호하기 위한 말숟가락 놓기에 바쁘다. 야당도 국정농단을 빗댄 '휴가농단'으로 사안을 규정짓고 공세에 몰두하고 있다.
아쉬운 대목은 이순신처럼 '안되는 것은 안된다'는 군율이 군 내부에서 제대로 작동했거나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다면 논란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정권을 가진 장교를 비롯한 군 고위층이 모두 이순신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점을 모두가 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행동하면 융통성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로 분류되기 십상이다.
철종의 삼정문란 개혁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세력을 견제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동김씨의 폭주로 조선은 어지러워졌고 흥선대원군이 삼정의 문란을 어느 정도 혁파했으나 세계사의 흐름 속에 뒤처진 조선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오승주 뉴스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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