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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웬흐우타이(Nguyễn Hữu Thái)- 4월 30일의 산 증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라디오방송국의 녹음실에는 몇몇 간부들과 남부해방군 전사들 외에도 증반민(Dương Văn Minh)대통령과 사이공 정권 내부 인물들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진행되었다. 이 날의 과정을 직접 목격한 특별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사이공 대학생 총 협회 전 주석, 응웬흐우타이(Nguyễn Hữu Thái)씨다.

응웬흐우타이씨는 1975년 4월 30일 낮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순간의 산 증인이다.
사진:응웨뤈 (Nguyễn Luân)

 

40년 전 4월 30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통일 궁이다.
사진:응웬뤈(Nguyễn Luân)

 

응웬흐우타이(Nguyễn Hữu Thái)과 역사적인사진. 사진에서:증반민(Dương Văn Minh)대통령과 사이공 정권 내부 인물들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사진:응웬뤈(Nguyễn Luân)
 

응웬흐우타이씨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들어 있는 탱크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사진:응웬뤈(Nguyễn Luân)
 

많은 해외 관광객들은 타이 씨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인물을 우연치 않게 만난 것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고, 흥미로워 했다.사진:응웬뤈(Nguyễn Luân)
 

그가 4월 30일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한다. 사진:응웬뤈(Nguyễn Luân)
 

응웬흐우타이(Nguyễn Hữu Thái)과 친구의감격적인해후.사진:응웬뤈 (Nguyễn Luân)

“우리는 사이공-쩌렁(Chợ Lớn) -쟈딘(Gia Định) 혁명 인민위원회의 대표들입니다. 우리는 12시 전에 해방군 형제들과 함께 가장 먼저 통일 궁으로 들어가 통일 궁 위에 깃발을 꽂을 것입니다. 우리는 후인반떵(Huỳnh Văn Tòng)교수와 사이공 대학생 총협회 전 주석 응웬흐우타이 입니다… 호찌민 주석이 간절히 바래오던 평화롭고 평범한 삶이 다시 사이공-호찌민시에 찾아오고 해방되었습니다. 사이공정권의 증반민씨와 부반머우(Vũ Văn Mẫu)씨에게 이 도시에서의 항복문제에 관한 호소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이는 응웬흐우타이씨가 1975년 4월 30일 낮에 사이공 라디오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전한 내용이다. 그의 말에 곧바로 이어 증반민 베트남 공화국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사이공이 아무런 저항 없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났으며 국가가 다시 하나로 통일되었다. 응웬흐우타이씨는 1975년 4월 30일 낮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순간의 산 증인이다.
응웬흐우타이씨는 1940년 다낭(Đà Nẵng)시에서 태어났다. 사이공대학에서 건축과와 법학과를 전공하였고, 그는 본래 건축가였다. 타이씨는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남부지방의 청년, 대학생, 학생들의 투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활동했다. 그는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제도가 몰락한 직후 사이공 대학생 총 협회의 첫 번째 주석(1963-1964)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임기기간 동안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미국의 베트남 내무 간섭을 반대하는 시위와 각종 운동을 주최하고 참가하였다.
혈기 왕성한 사이공 대학생 총 협회의 전 주석이었던 그는 40년이 지난 지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으며, 몸은 무척 말라있었다. 75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쾌하고 총명한 두 눈은 여전히 반짝인다. 그와 그의 아내는 현재 원만한 가정생활을 영유하고 있으며, 부부 모두 뚜렷한 업적과 공로를 가지고 있다.
호찌민시 빈탄(Bình Thạnh)군에 위치한 딸의 개인 호텔에서 타이 씨는 매우 기쁘게 기자단 한 사람씩 악수를 청하고 친절하게 안부를 물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은 우리를 40년 전 4월 30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통일 궁과 사이공 라디오방송국(현재의 호찌민시 인민 언어라디오)으로 안내했다.
통일 궁의 정문으로 들어선 후, 응웬흐우타이씨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들어 있는 탱크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많은 해외 관광객들은 타이 씨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인물을 우연치 않게 만난 것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고, 흥미로워 했다. 그들은 그가 4월 30일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을 그의 딸 티나 티엔응아(Tina Thiên Nga)씨의 통역을 통해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탱크 병사 한 명이 탱크에서 뛰어 내려와 반은 파란색, 반은 빨간색인 해방 전선기를 탱크에 매달았다고 한다.사진:잔마이흐엉(Trần Mai Hưởng) - 베트남통신사
 

사이공 라디오방송국의 녹음실에는 몇몇 간부들과 남부해방군 전사들 외에도 증반민(Dương Văn Minh)대통령과 사이공 정권 내부 인물들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진행되었다. 사진:자료
 

해방군의 전사들 및 간부들은 증반민 대통령과 사이공 정권의 몇몇 내부인사들을 사이공라디오방송국으로 끌고 가서 항복 선언서를 읽게 했고, 그 자리에 타이 씨가 동행했다.사진: 자료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통일의 기쁨으로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사진:자료
 

수 만 명의 사람들이평화로운 나라축하한미팅에 참여하였다.사진: 베트남 픽토라알의 자료
 
타이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1975년 4월 30일 그는 오전 9시가 지났을 즈음 독립 궁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와 그의 취재팀이 독립 궁에 있을 때 통일대로(오늘날의 레주언(Lê Duẩn)거리)에서는 매우 장엄한 장면이 펼쳐졌다. 북 베트남 해방군의 전차여대가 독립 궁의 입구를 받아 넘어뜨렸고 무서운 기세로 궁 안쪽으로 돌진해왔다. 탱크 병사 한 명이 탱크에서 뛰어 내려와 반은 파란색, 반은 빨간색인 해방 전선기를 탱크에 매달았다고 한다. 타이씨는 나중에 그 병사가 부이꽝턴(Bùi Quang Thận)씨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 타이씨와 후인반떵 교수는 궁의 로비에서 서있었다. 턴병사가 궁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본 타이 씨는 앞으로 나와 길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턴씨는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다가 타이 씨가 손목에 파란색과 붉은색의 리본을 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의 뒤를 따라 갔다고 한다.
그렇게 비좁은 계단을 따라 궁 옥상에 올랐지만 사이공 정권의 3선 기가 너무 세게 묶여있어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그 깃발을 내리고 해방군의 해방 전선기를 매달아 올릴 수 있었다. 이제 해방 전선기가 궁 옥상에서 펄럭이자 함성소리와 하늘을 향한 총 소리가 곧바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타이 씨는 바로 그날 낮에 또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점이 그로 하여금 4월 30일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산 증인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날 낮에 해방군의 전사들 및 간부들은 증반민 대통령과 사이공 정권의 몇몇 내부인사들을 사이공라디오방송국으로 끌고 가서 항복 선언서를 읽게 했고, 그 자리에 타이 씨가 동행했다.
사이공라디오방송국에서의 당시 상황은 매우 긴박했고, 타이씨는 증반민 대통령이 항복을 선언하는 것을 라디오 방송으로 내보내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부득이 하게” 아나운서로서의 임무를 맡게 되었고 남부지방의 말투와 어조, 발음으로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통보가 방송되었다. 그의 말이 끝난 후 곧바로 베트남 공화제도의 마지막 대통령인 증반민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 순간은 사이공 시간으로는 14시 20분, 하노이 시간으로는 13시 20분이었다. 당시에는 사이공 시간이 하노이 시간 보다 1시간 늦었다.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통일의 기쁨으로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타이 씨에게 있어서 그 순간은 일평생 동안 잊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사이공 라디오방송국을 다시 찾았다. 전쟁이 끝나는 그 위대하고도 특별한 순간에 자신이 사용했던 책상과 마이크를 보고 다시 한 번 가슴 속에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을 느꼈다.
그에 의하면, 1975년 4월 30일 저녁 사이공의 하늘은 비행기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으며, 평화롭고 고요했다고 한다. 거리에는 더 이상 군차의 경적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화포의 불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아주 멀리에서 들려오는 총 소리가 긴 정적을 깨곤 했다. 그 날이 평화로운 나라, 형제자매들이 다시 함께 모여 보낸 통일된 조국의 첫 날밤이었다.
                                                   [베트남통신사_응웬오안(Nguyễn Oanh )기자, 응웬뤈(Nguyễn Luân)사진]

honghan

아휭(A Huynh)- 석재악기의 장인

아휭(A Huynh)- 석재악기의 장인

아휭(A Huynh)은 어떤 음악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릉(tơ rung),딩닝(ting ning), 크니(k’ni), 단다(đàn đá)의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처럼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그는 Ja Rai 사람들의 고대 악기 대부분을 만들고 연주하는 방법을 아는 젊은 우수 장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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