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닌 ‘동호 민화’, 현대적 부활과 지속 가능한 보존을 향한 웅비

베트남 북부 박닌시(Bắc Ninh) 투언타인(Thuận Thành) 지역의 고즈넉한 풍경 속, 굽이치는 강물을 따라 자리 잡은 동호(Đông Hồ) 마을에서 수백 년 동안 베트남 농촌의 소박한 삶, 정겨운 정서, 그리고 민중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온 동호 민화가 이제 단순한 전통 공예품의 테두리를 넘어 유네스코(UNESCO)가 공인한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와 현대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존폐의 기로에 섰던 이 독창적인 민속예술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하고 있는지, 그 눈물겨운 보존의 역사와 미래 지향적 발전상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500년 베트남 농촌의 거울: 동호 민화의 역사와 예술적 뿌리

약 5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동호 민화는 베트남 민족의 역사적 궤적과 삶의 애환을 비추는 거울이다. 설 명절(Tết)이 다가오면 베트남의 각 가정은 어김없이 동호 민화의 손길을 기다렸다. 거실 벽을 장식하며 한 해의 평안, 다복, 풍요를 기원하던 이 그림들은 단순한 장식품 그 이상이었다.

동호 민화 제작에 사용되는 목판, 지아(Dó) 종이 및 천연 안료 재료들.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동호 민화의 진정한 가치는 완벽한 수공업 제작 공정과 자연 친화적인 물성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의 화학 안료와 기계 인쇄가 판치는 세상과 달리, 동호 민화는 닥나무 껍질을 정성껏 두드려 만든 고유의 ‘지어(Dó) 종이’를 사용한다. 여기에 조개껍질 가루를 갈아 만든 하얀색(바삭하고 반짝이는 질감을 냄), 회화나무 꽃에서 추출한 노란색, 쪽풀에서 얻은 푸른색, 대나무를 태운 숯으로 빚어낸 검은색 등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 색채만을 고집한다.

동호 민화 인쇄용 목판을 조각하는 공정.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동호 민화 장인이 목판을 활용해 그림을 인쇄하고 있다. 사진: 공닷(Công Đạt)/베트남픽토리알
인쇄를 마친 동호 민화가 잉크의 발색과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햇볕 아래 건조되고 있다. 사진: 공닷(Công Đạt)/베트남픽토리알

예술적 깊이를 더하는 또 다른 핵심은 정교한 수공예 목판 각인 기법이다. 숙련된 장인들이 수 세대에 걸쳐 물려받은 고대의 목판은 그 자체로 베트남의 문화재이자 가문의 보물이다. 인쇄 방식 역시 대량 생산의 기계음이 아닌, 장인의 손바닥과 문지름 도구가 종이와 목판 위를 오가는 고요하고 경건한 노동의 산물이다.

작품의 주제 또한 매우 풍부하고 해학적이다. 악귀를 쫓고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는 ‘오호(Ngũ hổ, 다섯 마리의 호랑이)’, 자손의 번창과 부귀영화의 소망을 담은 ‘영화부귀(Vinh hoa, Phú quý)’, 당시 사회상의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쥐의 결혼식(Đám cưới chuột)’, 아이들의 올바른 인성 교육을 도모하는 ‘글 읽는 두꺼비(Thầy đồ cóc)’ 등은 베트남 농경 사회의 정신세계와 도덕률을 가장 진솔하게 대변한다.

동호 민화의 대표적인 작품들.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벼랑 끝에서 만난 기적: 유네스코 긴급보호목록 등재와 국가적 결단

그러나 찬란했던 전통도 20세기 후반 베트남이 급격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고 서구적 대중문화가 유입되면서 큰 시련을 맞이했다. 값싸고 대량 생산된 인쇄물에 밀려 동호 민화를 찾는 발길이 급감했고,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많은 장인 가문이 가업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으로 전향했다. 후계자를 찾지 못한 채 낡은 목판만이 먼지에 쌓여가던 동호 마을은 침묵에 휩싸였고, 전통 회화의 명맥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베트남 정부와 문화계, 그리고 지역 주민들은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의 끈질긴 학술적 고증, 보존 운동, 그리고 국제 사회와의 긴밀한 공조 끝에 마침내 역사적인 쾌거를 이루어냈다. 동호 민화 제작 기술이 유네스코 ‘시급히 보호해야 할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공식 등재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국제적 명예 획득을 넘어, 소멸 위기에 처한 인류의 자산을 전 세계가 함께 지켜내야 한다는 엄중한 책무와 기회를 동시에 부여받은 순간이었다.

박닌시 투언타인 지역에 위치한 동호 민화 보존 센터.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유네스코 등재 직후, 베트남 정부와 박닌성 당국은 즉각적으로 ‘지속 가능한 보존 및 발전 마스터플랜’을 가동했다. 황다오끄엉(Hoàng Đạo Cương)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겸 유네스코 베트남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은 베트남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학교 정규 교육 과정과 연계한 전수 프로그램 개설, 장인들에 대한 물적·제도적 지원, 천연 원자재 수급 안정화, 그리고 국내외 판로 개척을 아우르는 다각적인 실행 계획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특히 지난 3월 박닌성(현 박닌시)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동호 민화 유네스코 등재 인증서 수여식’과 ‘2026 유산의 고향으로’ 페스티벌은 그 정점이었다. 베트남 국영방송의 VTV1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이 행사는 찬란한 드론 쇼와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그리고 전국 각지의 무형문화유산들이 한자리에 모인 대축전으로 꾸며져 국민적 자긍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베트남 민화 전시회 및 동호 민화 특별전’에는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과 청소년들이 찾아와 전통의 숨결을 직접 오감으로 체감하는 장이 마련되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동호 민화 전시관 및 관련 상품 코너를 관람하고 있다.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3세대를 잇는 불굴의 열정: 장인들의 사명감과 후계 양성

동호 민화가 암흑기를 뚫고 오늘날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은, 대가 끊길 위기 속에서도 자리를 지켜온 장인들의 숭고한 헌신과 자부심에 있다.

오랫동안 전통 문화의 정체성을 담아온 민화 제작으로 유명한 동호 마을은 현대 사회의 거센 물결 속에서 단 3개의 열정적인 가문만이 명맥을 이어오며 한때 소멸 위기를 겪었다. 이 세 가문 가운데 동호 민화의 ‘살아있는 유산’으로 꼽히는 3명의 명예 장인 응웬 당 체(Nguyễn Đăng Chế), 응웬 후 꾸아(Nguyễn Hữu Quả), 응웬 티 오아인(Nguyễn Thị Oanh)이 그 주인공이다.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그 중심에는 응웬 당 체(Nguyễn Đăng Chế) 명예 장인이 있다. 박닌성(현 박닌시) 투언타인 출신으로 평생을 동호 민화 연구와 보존에 바친 그는,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장구를 내려놓을 때에도 홀로 자리를 지키며 수백 점의 고대 목판을 수집하고 복원해 낸 장본인이다. 전통 방식 그대로 천연 염료를 만들고 닥나무 종이를 다루는 그의 손길은 단순한 기술의 전수를 넘어 베트남 문화의 혼을 지켜낸 방패막이였다.

"문화유산은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에 갇혀 구경거리로 전락할 때 죽습니다. 진정한 보존은 오늘날의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이 그림을 직접 만들고, 방에 걸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며 살아 숨 쉬게 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박닌 동호 민화의 응웬 당 체(Nguyễn Đăng Chế) 명예 장인

그의 뒤를 이어 현장을 누비는 대표적인 전승 세대로는 응웬 후 꾸아(Nguyễn Hữu Quả) 명인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전통 기법의 고수를 넘어, 현대 사회와 대중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각급 학교와 문화 공간, 국내외 미술 전시장을 동분서주하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동호 민화의 제작 과정을 시연하고, 그 속에 담긴 조상들의 지혜와 해학을 전파하고 있다. 그에게 동호 민화는 단순한 미술 상품이 아니라 베트남 농촌 공동체의 집단 기억이자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응웬 당 체(Nguyễn Đăng Chế) 명예장인이 후학들에게 전통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사진: 공닷(Công Đạt)/베트남픽토리알

현대적 변용과 '장벽 없는' 대중화: 젊은 세대의 창의적 결합

오늘날 동호 민화의 부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고루한 옛것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예술과 산업 디자인, 디지털 매체와의 과감한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응웬 당 탐(Nguyễn Đăng Tâm) 장인이 베트남 청소년아카데미에서 열린 ‘한지에 담긴 영혼’ 문화예술 프로그램 내 토크쇼에 참석해 가업을 잇고 전수해 온 감동적인 일화를 전하고 있다. 이 행사는 수많은 청년과 대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쩐 타잉 장(Trần Thanh Giang)/베트남픽토리알
동호 민화의 도안들이 대나무 병의 장식이나 조명의 문양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 쩐 타잉 장(Trần Thanh Giang)/베트남픽토리알

‘동호 민화의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젊은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전통의 투박한 선과 원색적 대조, 그리고 해학적 형태미에서 무한한 영감을 얻고 있다. 현대 패션 브랜드의 의류 패턴, 그래픽 디자인 작품, 대규모 공공 예술 캠페인,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 아트에 이르기까지 동호 민화의 모티브는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젊은 세대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장인의 따뜻한 지도 아래, 청년들이 산과 들의 풀과 나무에서 얻은 자연 색채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직접 그림 제작 공정을 체험해 보고 있다. 사진: 쩐 타잉 장(Trần Thanh Giang)/베트남픽토리알

또한, 박닌시 일대에는 주말마다 학생들이 직접 지아 종이에 목판을 얹고 천연 물감을 찍어내는 ‘전통 판화 체험 교실’이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 딱딱한 역사 교육이 아닌, 손끝으로 느끼는 체험형 문화 교육은 디지털 세대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전통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만드는 강력한 교육적 도구가 되고 있다.

세계로 향하는 날갯짓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과제

국내적 부흥에 발맞추어 동호 민화는 이제 베트남 국경을 넘어 세계 무대로 발을 넓히고 있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문화 홍보 행사 등에서 동호 민화는 그 독보적인 미니멀리즘과 자연 친화적 철학으로 전 세계 예술가들과 외교가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동호 민화의 소박한 색감과 질감이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철학과도 통하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응웬 당 탐(Nguyễn Đăng Tâm) 장인(유공장인 응웬 당 체  장인의 아들)이 관람객들에게 동호 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물론 벅찬 성과와 환호 뒤에도 냉정한 현실의 과제들은 상존한다. 전통 원자재의 안정적인 수급망을 유지하는 문제, 숙련된 전문 장인의 풀을 넓히고 청년 전승자들이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위에서 창작에 매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보완은 여전히 숙제다. 행정 당국과 지역사회, 그리고 상업 자본이 상생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랑 끝에서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동호 민화의 행보는 베트남 문화 예술계에 거대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이 고립된 유물이 아니라, 현대의 혁신과 결합할 때 얼마나 폭발적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산증거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동호 민화 보존 센터 내 동호 민화 창작 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응웬 후 꾸아(Nguyễn Hữu Quả) 장인이 동호 민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투언타인의 강바람을 타고 수백 년을 건너온 목판의 압정 소리, 그리고 그 위에 얹히는 자연의 색채들은 이제 박닌을 넘어 베트남의 민족혼을 세계인의 가슴속에 아로새기며 미래를 향해 찬란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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