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0/2018 09:01 GMT+7 Email Print Like 0

혁명전사인 도 므어이 동지, 홍강의 아들

“망연한 홍하(Hồng Hà,홍강)가
 고향 시골까지 흐르다...”

 
(Hồng) 강변마을인 하노이 타잉찌(Thanh Trì)현 동푸리엣 (Đông Phù Liệt, 현 동미)마을은 20세기 말의 혁명전사이며,1988년부터1991년까지 국가평의회 의장(현 총리), 1991년부터 1997년까지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한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의 지도자였던 도 므어이(Đỗ Mười)동지의 고향이다.  도 므어이 동지가 2018년 10월 1일 오후 11시12분 서거하여 베트남 인민들의 애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는 1917년(병진년) 2월 2일에 응웬주이(Nguyễn Duy)씨 일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딩띠엔황(Đinh Tiên Hoàng)왕조의 공신인 딩꾸옥공 응웬박 (Đinh Quốc Công Nguyễn Băc)재상의 후선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농부이며 홍강변의 풍족한 고향 땅에서 살았다. 그와 형제 4명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를 다니면서 부모를 돕기 위해 농사일도 하였다.

그는 1936년에 옻칠 공예자로 일을 하면서 혁명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가족은 많은 비밀 활동 공산주의 전사들을 보호하였다. 1929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당원으로 가입하고 지방 당원 및 시민과 함께 세금 절감과 인권법을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자신의 열정을 갖고 홍강변 지역의 마을들을 방문하여 시민들을 유세활동을하며 혁명세력을 키웠다. 노도의 시절에 성실히 활동했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남아있다.

프랑스 식민당국의 치열한 추적으로 인해 그는 구속 되어 하노이 활러(Hỏa Lò)교도소에서  10년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수감 3년차였던 1954년3월9일에 일본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틈을타 수감된 정치범동지들과 함께  활러교도소를 탈옥하여 대외활동을 지속해서 펼쳤다. 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불교 쩜롱(Trầm Lộng)사원에서 종지기로 살기도 했다. 공부하기를 매우 갈망한 그는 불교와 혁명에 대해  깊은 생각과 인식을 갖추게 되었다.

8월 혁명의 성공이 얼마 되지않은 상황속에도 반프랑스전을 전개해야 나갔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나라가 ‘생존과 멸망의 기로’에 서있는 상황에서 그는 하동(Hà Đông)성, 하남(Hà Nam)성, 남딩(Nam Định)성, 닝빙(Ninh Bình)성, 화빙(Hòa Bình)성 등의 당 비서 및 3지구의 당위원회 부비서 겸 항전 행전위원회 부위원장, 3지구군의 정치지도원 겸 사령관으로 북부평야 여러 지역을 지도 방문 하였다.

응안(Ngạn, 활동했던 그 당시에 예명)씨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홍강변 왼쪽 지구의 간사위원회 비서, 지구 사령부 정치지도원, 지구의 당위원회 비서 겸 항전 행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홍강변 지역에서 태어나 살아왔으며 이 홍강평야 델타지역에서도 혁명활동을 전개하고 항전운동에도 참여하여 프랑스식민시기에 9년간 역사적이고 웅대한 항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홍강 왼쪽지역은 전국민들의 전면적 항전의 선두에 나섰으며 힘들고 복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국민들의 전투적인 의지와 혁명운동 지속 의지를 생생하게 진행한 곳이다. 그리고 베트남 국민의 항전을 방해하려 했던 잔혹한 음모들을 항전 과정속에서 드로낸 명명백백하게 드러냈다.


도 므어이(Đỗ Mười)국가평의회 의장이 호치민묘 및 호치민박물관에 방문하러 온 하노이 및 타이빙(Thái Bình)성 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 (1990.05.19)

사진: 밍다오(Minh Đạo)/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국가평의회 의장이 1990년 5월 1일 꽝치(Quảng Trị)성에 방문하였다.
사진: 밍다오(Minh Đạo)/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국가평의회 의장이 1991년 3월 25일 하이퐁 시멘트공장에 방문하였다.
사진: 밍다오(Minh Đạo)/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과 제7회  베트남공산당 전체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의 모습. (1991년6월).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과 하노이에서 진행한 여성협회 제6회 집회위원회의
7차 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의 모습.
(1991년 10월 14일~17일)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이 1992년 11월 1일에 하노이(전 하떠이 성) 트엉띤(Thường Tín)현
레러이(Lê Lợi)읍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이 1992년 2월 
뛰엔꽝(Tuyên Quang)성 수소민족 고등학교에 방문하였다.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이 1993년3월5일 꽝치(Quảng Trị)성 쯔엉썬(Trường Sơn)국립묘지를 찾아
순국선열들에게 현화를 하였다.

전사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이 1994년 9월 박지앙(Bắc Giang)성 룩응안(Lục Ngạn)현 쭈(Chũ)읍에서
경제를 잘 운영한 한 가족에 방문하고 있는 모습.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이 1996년 9월28일 롱안(Long An)성 벤륵(Bến Lức)읍에서
안타익(An Thạch)고등학교 학생들과의 모습.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이 1996년2월7일 빙딩(Bình Định)성
뀌느언(Quy Nhơn)항구에 방문하였다.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도 므어이(Đỗ Mười)당 서기장이 1997년 12월21일 국방아카데미에 방문하고 있는 모습.
사진: 쑤언럼(Xuân Lâm)/베트남통신사

홍강 왼쪽 지역 군인들과 시민들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지시 하고 악행을 물리치고 함께 굶으며 참호생활을 했을 뿐만아니라 시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함께 일을 했던  도 므어이 지구 비서와 동무들의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 전국민들은 1954년5월7일 깟비(Cát Bi)공항을 습격하여 전투기 59대를 섬멸하고, 5도로에서 매복 공격하여 4대대를 물리쳤으며, 많은 도로와 기차를 파괴시켜 적군의 전략적인 병참선을 공격,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군사거점을 파괴시켜서 제네바협정의 승리에 기여하고 인도차이나에서 평화를 되찾아온 공적 등 홍강 왼쪽지역의 군인과 시민들은 지구 사령부의 지도자의 작전으로 찬란한 전투공격에 따른 승리에 대한 추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1955년4월 초, 그는 하이퐁시 공산당 비서 겸 시 군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어렵고 복잡한 상황 속에 북부를 공고하게 건설하기 위하여 1956년부터 그는 상공부차관, 국내통상부장관, 국가물가안정위원회 위원장, 국가감사단장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969년 그는 부총리 겸 국가 기본건설위원회 위원장, 건설부장관에 임명 되어 하이퐁항구건설을 위해 현장철거 및 파괴전쟁 복구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하이퐁 간부, 직원과 시민들은 밤새 현장에서 군인 및 직원들과 함께 남겨진 지뢰 장벽 및 수뢰를 철거한 도 므어이 부총리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아 중앙 전선지원위원회 위원장으로 자주 직접 여러 어려움과 난관문제를 해결하며 항미전, 남부해방운동, 국가통일 등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20년동안 국가평의회 의장과 여러 분야의 책임자로 겸직하며 사회주의의 인프라를 공고히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힘과 지식을 십분 기여하였다. 호치민주석 묘와 박물관, 화빙(Hòa Bình)-치안(Trị An)-야리(Yaly)수력발전소 및 팔라이(Phả Lại)화력발전소, 오일과 가스 개발시설, 재난방지 시설등 나라의 중요한 인프라에서 그는 항상 모든 난관에 선봉으로 책임을 맡아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1988년6월23일 제8회 국회 제3차 회의에서 그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총리 칙잭과 같음)으로 임명되였다.

탄생 85주년 때 도 므어이(Đỗ Mười)동지의 사진이다.
사진: 응웬탕(Nguyễn Thắng)

도 므어이(Đỗ Mười)동지와 손자들의 모습.
사진: 응웬탕(Nguyễn Thắng)

85세가 되었는데도 매일 책과 함께 지낸 도 므어이(Đỗ Mười)동지의 모습.
사진: 응웬탕(Nguyễn Thắng)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
사진: 빙꽝(Vinh Quang)

도 므어이(Đỗ Mười)동지와 베트남픽토리알 빙꽝(Vinh Quang)기자 및 응웬탕(Nguyễn Thắng)기자의 모습.
사진: 베트남픽토리알 자료사진
그는 6개월동안 당과 국가의 지도부 동지들, 경제전문가들, 과학전문가들과 함께 국내 및 국제 경험을 활용해서 새로운 경제정책들을 시도하고 지도하였으며 ‘전속력으로 인플레이션 상승’을 막고 생산진흥 및 촉진을 추진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991년6월 중앙공산당 제 7회 전국인민대표회는 국내 및 국제의 어렵고 복잡한 상황속에 진행되었는데 도 므어이 국가평의회 의장(현 총리)은 당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나라의 ‘도이머이”라는 개혁정책을 지도한 역할로 계속 이어갔으며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거대한 성과를 달성했다. 그리고 도이머이(혁신정책)을 전개하여 나라의 공업화-현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2002년 2월에 발행한 베트남픽토리알  518호에서 나온 도므이어(Đỗ Mười)동지 초상화 사진 





도 므어이 동지는 현장을 직접 찾아 어려움과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제일 힘든 장소, 순간에는 항상 앞장섰다. 그는 여러 지방을 방문하여 시민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시민의 의견을 청취하여 모든 업무를 빠르고 결단적으로 이행했다. 그는 모든 인민들의 기쁨과 괴로움에 대해 따뜻하고 관대한 이해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의 취미는 독서다. 쉬는 시간에는 항상 독서에 투자하였다. 읽었던 책을 통해 여러 진리, 해결책, 대처법을 찾아냈다. 그는 가정에 성실하고 모범적인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였다. 그의 형제는 도시와 시골에서 각각 살고 있는데 모두 다 열심히 청렴한 생활을 견지하였다. 매년 모든 가족은 홍강변 지역의 타잉찌(Thanh Trì)현 동미(Đông Mỹ)에 위치한 고향집으로 돌아와 설날을 지내는데 조상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기념사를 진행한다.

그의 인생은 고향에 있는 홍강의 파도처럼 활발하게 흐른다. 홍강의 아들인  도 므어이 동지의 공로는 역사로 남아 충효의 자식으로 평생을 국민, 가족과 조국에 기여했음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기사:영화감독인 다오쫑카잉(Đào Trọng Khánh)국민아티스트
사진: 빙꽝(Vinh Quang), 응웬탕(Nguyễn Thắng) 및 자료사진
(이 기사는 도므어이 동지의 탄생  85주년 기념하기 위해
2002년 2월 베트남픽토리알 518호에서 발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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